“올해 목표는 50권 읽기야”

작년 12월 31일, 새해 목표를 세웠다.
“2024년에는 책 50권 읽기!”
그리고 독서 기록 앱을 깔았다. Goodreads, 밀리의 서재, 플라이북… 다 써봤다.
“기록하면 더 잘 읽게 될 거야.”
처음 2주는 완벽했다. 읽은 책마다 앱에 등록하고, 별점 주고, 독서 노트 남기고,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벌써 3권 읽었네! 이 페이스면 50권 거뜬하겠는데?”
그런데 2월이 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책을 읽는 것보다 “등록”하는 게 중요해졌다

어느 날 서점에서 책 3권을 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앱에 “읽고 싶은 책”으로 등록하는 것이었다.
- 책 표지 사진 찍기
- 제목, 저자, 출판사 입력
-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추가
- 카테고리 분류 (자기계발, 소설, 에세이…)
- 읽을 예정일 설정
이 과정에 10분이 걸렸다. 정작 책은 한 페이지도 안 읽었다.
“일단 등록해놓으면 나중에 읽겠지.”
그렇게 “읽고 싶은 책” 목록에 47권이 쌓였다. 실제로 읽은 건? 5권.
숫자가 목표가 되어버렸다

독서 앱은 친절하게도 통계를 보여준다.
- 올해 읽은 책: 8권
- 목표 달성률: 16%
- 평균 독서 속도: 월 0.8권
- 가장 많이 읽은 카테고리: 자기계발
매주 일요일마다 이 통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초조해졌다.
“이 페이스면 50권은 무리야. 목표를 30권으로 낮출까?”
Todoist에서 완료율을 올리려고 쉬운 할 일만 골랐던 것처럼, 독서 앱에서도 숫자를 맞추려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 얇은 책 위주로 고르기 (페이지 수 적은 책이 “효율적”)
- 에세이나 시집 선택 (빨리 읽힘)
- 진짜 읽고 싶은 두꺼운 책은 미루기
책을 읽는 기준이 “내가 읽고 싶은가”에서 “빨리 읽을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
독서 노트 쓰는 게 또 다른 숙제가 되었다
앱은 독서 노트 기능도 제공한다.
“책을 읽고 기록하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거야!”
그래서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상 깊은 문장을 밑줄 긋고, 앱에 메모했다.
- 페이지 번호 기록
- 인용구 타이핑
- 내 생각 정리
- 카테고리 태그 추가
책 한 권 읽고 독서 노트 정리하는 데 1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책 읽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다 읽고 나서 노트 정리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책장이 멀어졌다.
습관 트래커에서 체크박스 채우는 게 습관보다 중요해졌던 것처럼, 독서 앱에서도 기록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책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6개월 후, 독서 앱을 열어봤다.
- 읽은 책: 12권
- 읽고 싶은 책: 89권
- 작성한 독서 노트: 7개
- 앱 사용 시간: 주당 평균 1시간 30분
앱에서 책 정보 검색하고, 등록하고, 통계 보고, 노트 정리하는 데는 열심이었다. 시간 추적 앱으로 매일 생산성 리포트를 확인했지만 실제 프로젝트는 하나도 완성 못 했던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책을 읽는 시간은?
작년(앱 없이 읽던 때): 주당 4~5시간
올해(앱 사용): 주당 2시간
독서 관리 앱이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고 있었다.
앱을 지우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7월, 독서 앱을 삭제했다.
처음엔 불안했다. “기록 안 하면 뭘 읽었는지 잊어버리는 거 아닌가?”
하지만 앱 없이 책을 읽기 시작하니, 순수하게 책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 목표 권수 신경 안 쓰고 읽고 싶은 책 고르기
- 페이지 수 상관없이 두꺼운 책도 도전
- 독서 노트 안 써도 괜찮음
- 통계 안 보니 초조함 사라짐
Before (앱 사용):
– 목표: 50권
– 실제: 12권 (6개월)
– 스트레스: 높음
– 독서 이유: 숫자 채우기
After (앱 삭제):
– 목표: 없음
– 실제: 18권 (6개월)
– 스트레스: 없음
– 독서 이유: 읽고 싶어서
지금은 이렇게 한다
앱 없이도 독서는 충분히 즐겁다.
1. 기록은 최소화
- 책 뒤표지에 읽은 날짜만 연필로 적기
- 인상 깊은 문장은 포스트잇만 붙이기
- 독서 노트 대신 친구에게 이야기하기
2. 숫자 신경 안 쓰기
- 연간 목표 없음
- 페이지 수 상관없이 읽고 싶은 책 고르기
- 중간에 그만 읽어도 괜찮음
3. 순수하게 즐기기
- “이 책 재미있나?” 만 기준
- 통계, 순위, 목표 전부 무시
- 책 읽는 자체가 목적
배운 교훈: 독서는 기록 대상이 아니라 경험이다
독서 앱이 나쁜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독이 되었다.
- 책 읽기보다 등록이 중요해졌고
- 내용보다 숫자가 목표가 되었고
- 경험보다 기록이 목적이 되었다
시간 추적 앱에서 생산성 점수만 보고 실제 성과는 못 봤던 것처럼, 독서 앱에서도 측정 가능한 것만 중요해졌다.
진짜 독서의 가치는:
– 연간 50권이 아니라
– 한 권을 깊이 읽고 생각이 바뀌는 경험
– 기록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문장
–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내면의 변화
독서 앱을 삭제한 건 실패가 아니다. 책 읽는 즐거움을 되찾은 과정이었다.
당신에게도 독서 앱이 필요한가?
한 번 생각해보자.
- 책을 읽는 시간보다 앱 관리하는 시간이 더 긴가?
- 읽고 싶은 책보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는가?
- 독서 목표 숫자가 스트레스인가?
- 기록 안 하면 불안한가?
만약 그렇다면, 한 달만 앱 없이 책을 읽어보자.
가장 좋은 독서는, 앱 없이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독서다.
목표 권수도, 독서 노트도, 통계도 필요 없다.
그냥 책을 펼치고, 읽고, 즐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