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면 생산적이 될 거야”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 추적 앱을 설치했다.
RescueTime—백그라운드에서 자동으로 모든 앱 사용을 추적하고, 어느 사이트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1분 단위로 기록한다. “생산적인 시간”, “비생산적인 시간”까지 분류해준다.
“이제 내 시간 사용 패턴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면 생산성이 올라갈 거야.”
한 달 동안 열심히 추적했다. 매일 저녁 리포트를 확인했고, 주간 요약을 분석했다.
하지만 생산성 점수는 올라가는데 정작 중요한 일은 안 끝나고 있었다.
첫 주: 모든 게 숫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RescueTime을 설치하고 나서,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 유튜브: 1시간 23분 (비생산적)
- Slack: 47분 (중립)
- VS Code: 2시간 15분 (매우 생산적)
- 노션: 38분 (생산적)
- Reddit: 19분 (매우 비생산적)
모든 앱, 모든 웹사이트가 “생산성 점수”로 분류되었다. 하루가 끝나면 “오늘의 생산성: 67%”라는 점수를 받았다.
처음엔 신기했다. “아, 내가 Reddit에 20분이나 썼구나. 이걸 줄여야겠다.” 명확한 데이터가 동기부여가 됐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숫자를 올리는 게 목표가 되어버렸다
3일째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생산성 점수”를 올리기 위해 행동을 바꾸기 시작했다. 실제로 생산적이어서가 아니라,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
예를 들어:
– 유튜브에서 개발 강의를 보는 건 “비생산적” 시간으로 분류됨 (YouTube = 비생산적)
– 하지만 VS Code를 켜놓고 아무것도 안 하면 “생산적” 시간으로 집계됨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VS Code를 계속 켜놓기 시작했다. 실제로 코딩을 안 하더라도, 문서를 읽거나 회의를 하거나 점심을 먹을 때도 VS Code 창을 띄워뒀다.
생산성 점수는 85%로 올라갔다. 실제 생산성? 오히려 떨어졌다. Todoist 완료율을 올리려고 쉬운 할 일만 골랐던 것과 똑같았다.
“매일 리포트 확인”이 또 다른 루틴이 되었다
매일 저녁 9시가 되면 RescueTime 대시보드를 열었다.
- 오늘의 생산성: 72%
- 생산적 시간: 4시간 38분
- 비생산적 시간: 1시간 52분
- 가장 많이 쓴 앱: VS Code (3시간 12분)
이 숫자들을 분석하고, 어제와 비교하고, 주간 평균을 계산하고, “다음 주에는 75%를 목표로 해야지” 같은 계획을 세웠다.
이 “시간 추적 분석”에 매일 20분씩 썼다. 한 달이면 10시간이다. 정작 그 10시간으로 실제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도구가 도구를 관리하는 시간을 만들어냈다. Slack 채널을 정리하느라 실제 업무를 못했던 것처럼, 시간 추적 앱도 같은 함정이었다.
“비생산적 시간”에 대한 죄책감
RescueTime은 친절하게도 “주의 산만 시간”을 표시해준다.
유튜브 30분, Twitter 15분, 뉴스 사이트 12분…
문제는 이 숫자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오늘 비생산적 시간이 2시간이나 됐네. 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심지어 점심시간에 유튜브를 보는 것조차 “비생산적” 시간으로 집계됐다. 쉬는 시간인데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쉬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졌다. 잠깐 멍 때리거나, 산책하거나, 친구와 수다를 떠는 시간—이 모든 게 “낭비된 시간”처럼 보였다.
습관 트래커에서 하루 빠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완벽주의를 느꼈던 것처럼, 시간 추적 앱도 “완벽한 하루”를 강요했다.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는 압박이었다.
Toggl, Clockify, Timing… 앱만 바꿔봤자
RescueTime이 자동 추적이라 부정확하다 싶어서, 수동 추적 앱을 시도했다.
Toggl—”프로젝트 A 작업” 시작 버튼을 누르고, 끝나면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확한 시간 집계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였다.
일을 시작할 때마다 “타이머 켰나?” 확인하고, 화장실 갈 때 타이머를 끄고, 돌아와서 다시 켜고, 점심시간에 끄고, 오후에 다시 켜고…
타이머를 관리하는 게 일이 되어버렸다. 캘린더 관리가 또 다른 일정이 되었던 것과 똑같은 역설이었다.
결국 어느 앱을 쓰든 문제는 같았다. “시간을 추적하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가 되는 아이러니.
진짜 생산성은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한 달 후, 시간 추적 데이터를 전부 모아서 분석해봤다.
- 평균 생산성: 73%
- 총 생산적 시간: 87시간
- 가장 생산적이었던 날: 화요일 (89%)
완벽한 데이터였다.
그런데 실제로 한 달 동안 뭘 이뤘는지 돌아보니… 별로 없었다.
중요한 프로젝트는 여전히 미완성이었고, 핵심 기능 하나 제대로 못 만들었고, 블로그 글도 한 편 못 썼다.
반면에, 시간 추적을 안 했던 전 달에는 중요한 프로젝트 2개를 완료했었다. 그때는 “생산성 점수” 같은 게 없었지만, 오히려 더 집중했고 더 많이 이뤘다.
깨달았다. 생산성은 “얼마나 시간을 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냈느냐”다.
결론: 시간은 측정 대상이 아니라 투자 대상이다
시간 추적 앱을 지웠다.
이제 숫자를 보지 않는다. 대신 결과를 본다.
“오늘 4시간 일했다”가 아니라, “오늘 기능 하나를 완성했다”가 중요하다.
“이번 주 생산성 78%”가 아니라, “이번 주 프로젝트 마일스톤을 달성했다”가 의미 있다.
시간 추적 앱은 데이터를 줬지만, 방향은 주지 못했다. 숫자는 늘었지만, 성과는 안 보였다.
결국 생산성 도구의 역설은 언제나 같다. 도구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진짜 목적을 잃는다. 노션도, Todoist도, 포모도로 타이머도, 그리고 시간 추적 앱도 마찬가지다.
자동화 도구로 시간을 절약하려다 오히려 설정에 4시간을 쓴 경험도 같은 문제였다. 측정과 최적화에 시간을 쓰다 정작 진짜 일은 못 했다.
가장 생산적인 시간은, 시간을 측정하지 않는 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