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맡기면 시간이 남겠지


“성공한 사람들은 다 위임을 잘한다.”
“시간당 가치가 낮은 일은 남에게 맡겨라.”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라.”
생산성 책에서 수없이 읽었다. 완벽한 생산성 시스템을 찾아 헤매던 시절에도 이 말을 믿었다.
맞는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위임의 시작

계기:
일이 너무 많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내가 다 하니까 문제지. 맡길 수 있는 건 맡기자.”
검색: “업무 위임 방법” “아웃소싱 시작하기”
발견:
1. 시간당 가치 계산법
– 내 시간당 가치 = 월급 / 근무시간
– 그보다 낮은 가치의 일 = 위임
– 그보다 높은 가치의 일 = 직접
2. 위임 가능한 업무 리스트
– 단순 반복 작업
– 자료 조사
– 일정 관리
– SNS 관리
– 디자인 작업
3. 아웃소싱 플랫폼들
– 크몽
– 숨고
– 프리랜서
– 가상 비서 서비스
“좋아, 시작해보자!”
가상 비서 서비스 가입: 월 30만원
첫 번째 위임: 자료 조사


업무: 시장 조사 자료 정리
예상 소요 시간: 내가 하면 3시간
위임 준비:
“음… 뭘 조사해달라고 해야 하지?”
작성한 요청서:
– 조사 범위
– 필요한 데이터 종류
– 원하는 형식
– 참고 자료
– 주의사항
요청서 작성 시간: 1시간
“이 정도면 됐겠지.”
결과 도착.
확인:
“어… 이게 아닌데…”
원하던 것과 다르다.
피드백 작성:
– 이 부분은 이렇게
– 저 부분은 저렇게
– 추가로 이것도
피드백 시간: 30분
수정 결과 도착.
“아직도 좀 다른데…”
2차 피드백: 20분
3차 수정 후 최종 확인: 20분
총 소요 시간:
– 요청서 작성: 1시간
– 1차 확인 + 피드백: 30분
– 2차 확인 + 피드백: 20분
– 최종 확인: 20분
– 합계: 2시간 10분
내가 직접 했으면: 3시간
절약한 시간: 50분
비용: 위임 비용 + 기다린 시간
“음… 이게 맞나?”
두 번째 위임: 디자인 작업
업무: 프레젠테이션 디자인
예상: 내가 하면 4시간 (디자인 못함)
요청서 작성:
“어떤 느낌으로 해달라고 하지?”
참고 이미지 찾기: 40분
요청서 작성: 30분
결과 도착.
“예쁘긴 한데… 내가 원하던 느낌이 아니야.”
피드백:
– 색상 이렇게
– 폰트 저렇게
– 레이아웃 이렇게
수정 1차: 다름
수정 2차: 조금 다름
수정 3차: 거의 됐는데…
수정 4차: 됐다!
총 커뮤니케이션 시간: 3시간
내가 직접 했으면: 4시간 (허접하지만)
위임 결과: 더 예쁨. 하지만 시간은 비슷.
세 번째 위임: 이메일 관리
업무: 이메일 분류 및 초안 답장
요청:
“중요한 메일은 알려주시고, 단순 문의는 답장 초안 작성해주세요.”
첫 주:
“이 메일은 중요한가요?” – 질문
“이건 어떻게 답장할까요?” – 질문
“이 경우는 어떻게 하죠?” – 질문
답변하느라: 매일 30분
둘째 주:
질문 줄었다. 하지만…
“어? 이거 중요한 건데 왜 안 알려줬지?”
확인하느라 또 시간.
셋째 주:
“그냥 내가 하는 게 낫겠다…”
AI 비서에게 모든 걸 맡기려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비슷한 결말이었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위임에서 반복되는 것:
- 요청서/설명 작성 시간
- 기다리는 시간
- 결과 확인 시간
- 피드백 주고받는 시간
- 재수정 확인 시간
실제로 절약되는 시간:
“직접 하는 시간” – “위임 관련 총 시간” = ???
종종 마이너스.
시간을 추적해서 어디에 쓰는지 분석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도 추적 자체에 시간이 더 들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1. 내 머릿속은 나만 안다
“이런 느낌으로요” – 설명 불가
설명하려면 시간.
설명해도 다르게 이해함.
다시 설명.
반복.
2. 컨텍스트 전달 비용
내가 3년간 쌓은 맥락.
새로운 사람에게 전달?
불가능에 가깝다.
매번 설명해야 함.
3. 품질 기준 차이
내 기준 80점 = 상대방 기준 100점
“이 정도면 됐죠?”
“아뇨, 좀 더…”
기준 맞추기 = 또 다른 일
4.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
“잘하고 있겠지…?”
결국 확인하게 됨.
확인 = 시간.
5. 작은 일은 위임 비용이 더 큼
30분짜리 일을 위임하면:
– 설명: 15분
– 확인: 10분
– 피드백: 10분
– 총: 35분
직접 하는 게 5분 빠름.
1초를 아끼려고 워크플로우를 최적화하다 3시간을 날린 경험과 똑같았다. 작은 효율을 위해 큰 비효율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진짜 위임이 되는 경우
그래도 효과 본 경우가 있다.
조건:
1. 반복적인 일
한 번 설명하면 계속 같은 패턴.
설명 비용이 나눠짐.
2. 명확한 결과물
“A를 B 형식으로” – 해석의 여지 없음.
“이런 느낌으로” – 망함.
3. 내가 못하는 일
전문 영역. 내가 배우는 것보다 맡기는 게 나음.
디자인, 영상 편집, 세무 같은 것.
4. 충분히 큰 일
설명 비용을 감당할 만큼 큰 일.
최소 10시간 이상.
새로운 기준
위임 전 체크리스트:
1. 설명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설명 시간 > 직접 하는 시간의 30%?
직접 해라.
2. 몇 번 반복될 일인가?
1회성이면 직접.
10번 이상 반복이면 위임 고려.
3. 결과물이 명확한가?
“이런 느낌” = 직접
“A 형식의 B 데이터” = 위임 가능
4. 확인 없이 믿을 수 있나?
계속 확인해야 하면 의미 없음.
5. 내 전문 영역인가?
전문 영역 아니면 위임.
전문 영역이면 직접.
위임보다 나은 대안들
1. 안 하기
“이 일이 정말 필요한가?”
위임할까 고민하는 일의 절반은 안 해도 됨.
2. 단순화하기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그러면 직접 해도 금방.
3. 자동화
사람에게 맡기기 전에 도구로 해결.
설명 필요 없음. 한 번 세팅하면 끝.
물론 자동화 워크플로우 100개를 만들다가 오히려 복잡해진 경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4. 템플릿화
반복되는 일은 템플릿으로.
매번 새로 하는 것보다 빠름. 워크플로우 만드는 게 일이 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템플릿은 간단하게.
5. 일괄 처리
작은 일 여러 개를 모아서.
컨텍스트 스위칭 비용 줄임.
현재 상태
위임하는 일:
– 전문 영역 (세무, 법무)
– 10시간 이상의 프로젝트
– 명확한 결과물이 있는 반복 업무
직접 하는 일:
– 1-2시간 이하의 일
– “이런 느낌”이 필요한 일
– 1회성 업무
버린 일:
– 하던 일의 30% 정도
결과:
– 위임 비용 감소
– 실제로 시간 남음
– 스트레스 감소
깨달은 것
1. 위임도 일이다
위임 = 설명 + 확인 + 피드백 + 관리
공짜가 아님.
2. 작은 일은 직접
위임 오버헤드가 큼.
차라리 직접 빨리 끝내는 게 나음.
3. 설명 못하면 위임 못함
내 머릿속에만 있는 건 위임 불가.
설명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일.
4. 안 하는 게 최고의 위임
남에게 맡기기 전에 물어보자.
“이거 꼭 해야 하나?”
5. 위임은 투자
단기적으론 손해.
장기적으로 반복되는 일만 위임.
우선순위 정하다가 하루를 날린 경험에서 배운 것과 같다. 판단 자체에 시간을 너무 쓰면 안 된다.
결론: 위임의 역설
위임의 함정:
문제:
– 설명하느라 시간 듦
– 확인하느라 시간 듦
– 피드백하느라 시간 듦
– 직접 하는 것보다 오래 걸림
해결:
– 작은 일은 직접
– 반복되는 일만 위임
– 명확한 결과물만 위임
–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하기
“일을 맡기면 시간이 생긴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잘 맡기면 시간이 생기고, 못 맡기면 시간이 두 배로 든다.
가장 효율적인 위임은 안 해도 되는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일 자체를 없애면 위임할 필요도 없다.
P.S. 이 글도 AI에게 써달라고 할까 고민했다. 근데 “이런 느낌으로”를 설명하는 데 30분 걸릴 것 같아서 직접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