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시보드만 있으면 체계적으로 살 수 있겠지

“내 인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유튜브에서 본 생산성 유튜버의 대시보드는 환상적이었다. 생산성 유튜브를 보다가 하루가 가버린 적도 있었다. 할 일 목록, 프로젝트 진행 상황, 습관 트래커, 독서 기록, 재정 현황까지. 모든 게 아름다운 차트와 그래프로 정리되어 있었다.
“저렇게 정리하면 나도 체계적으로 살 수 있겠다.”
그날부터 대시보드 만들기가 시작됐다.
완벽한 대시보드 설계에 돌입했다

노션을 열었다. 그리고 설계를 시작했다.
메인 대시보드 구성:
– 오늘의 할 일
– 주간 목표
– 월간 프로젝트
– 습관 트래커
– 독서 로그
– 운동 기록
– 지출 현황
각각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필터를 걸고, 롤업으로 연결하고, 수식으로 통계를 뽑았다. “이번 주 완료율”, “이번 달 독서량”, “운동 빈도 그래프” 같은 것들.
디자인도 신경 썼다. 컬러 코딩, 아이콘 배치, 섹션 나누기. 보기 좋아야 쓰고 싶어지니까. 유튜브에서 “노션 꾸미기” 영상도 찾아봤다.
일주일이 지났다. 대시보드는 거의 완성됐다. 노션 대시보드 꾸미기의 함정과 정확히 같은 상황이었다. 그 일주일 동안 정작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안 했다.
데이터 입력이 일이 되어버렸다
대시보드가 완성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매일 데이터를 입력해야 했다. 아침에 오늘 할 일 등록, 저녁에 완료 체크, 독서하면 기록, 운동하면 기록, 지출하면 기록.
처음엔 재미있었다. 체크박스를 클릭할 때마다 통계가 바뀌는 게 뿌듯했다. 습관 트래커의 역설이 생각났다. 그런데 점점 귀찮아졌다. 독서 30분 하고 기록하는 데 10분이 걸렸다. 운동하고 세부 사항 입력하는 게 번거로웠다.
“나중에 한꺼번에 입력해야지” 하다가 잊어버렸다. 그러면 데이터가 빈다. 빈 데이터가 있으면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하지 않은 통계를 보면 짜증이 난다.
결국 대시보드 자체가 스트레스가 됐다.
보기 좋은 데이터가 좋은 결과를 의미하진 않았다

어느 날 대시보드를 보다가 깨달았다.
“완료율 85%”라고 떠 있었다. 근데 왜 하나도 뿌듯하지 않지?
자세히 보니까 완료한 일의 절반은 “대시보드에 데이터 입력하기” 같은 거였다. 진짜 중요한 일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독서량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달 3권 완독”이라고 떴지만, 정작 읽은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났다. 독서 노트의 딜레마와 비슷했다. 독서 기록 쓰느라 바빠서 내용을 곱씹을 시간이 없었다.
운동 기록은 더 웃겼다. 운동 시간보다 기록 시간이 더 긴 날도 있었다. “오늘 스쿼트 3세트, 15회씩, 휴식 60초…” 이런 걸 다 적고 있었다.
대시보드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문제는 방향이 뒤바뀐 거였다.
원래는 “생산적으로 살기 위해” 대시보드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시보드를 예쁘게 채우기 위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독서를 해서 기록하는 게 아니라, 기록하려고 독서했다. 운동을 해서 입력하는 게 아니라, 입력하려고 운동했다. 할 일을 끝내서 체크하는 게 아니라, 체크하려고 쉬운 일만 만들었다.
대시보드가 예쁘게 채워지면 뿌듯했다. 하지만 실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생산성 도구의 함정과 똑같았다. 숫자와 그래프에 속고 있었던 거다.
이제는 단순하게 쓴다
대시보드를 버리진 않았다. 대신 대폭 단순화했다.
남긴 것:
– 오늘 할 일 3개 (그 이상은 안 씀)
– 주간 핵심 목표 1개
버린 것:
– 습관 트래커
– 독서 통계
– 운동 기록
– 지출 차트
– 온갖 롤업과 수식
입력에 걸리는 시간을 하루 2분 이내로 줄였다. 그러니까 진짜 쓰게 됐다. 생산성 유튜버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하기보다 내게 맞는 방식을 찾은 거다.
체계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구는 여전하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사는 것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건 다르다는 걸 이제는 안다.
결과를 보여주는 대시보드가 결과를 만들어주진 않는다
대시보드는 거울이다. 현재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거울을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내가 예뻐지진 않는다. 대시보드를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내가 생산적으로 변하진 않는다.
숫자가 예쁘게 올라가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그 기분은 진짜 성취감이 아니다. 일을 했기 때문에 느끼는 게 아니라, 기록했기 때문에 느끼는 거다. 불렛저널의 역설도 같은 이유였다.
이제 대시보드를 볼 때마다 묻는다.
“이 숫자가 예뻐서 기분 좋은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 했기 때문에 기분 좋은 거야?”
대부분은 전자였다. 그래서 이제 대시보드는 덜 본다. 템플릿을 수집하는 것도 그만뒀다. 그냥 일을 한다.